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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이야기 : 2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Movie/영화 이야기 2018. 8. 12. 00:09


    내러티브라는 무기를 장착한 영화는 본격적으로 예술산업으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현재에도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고 있는 할리우드는, 1920년대에는 영화산업이 본격화되는 공장처럼 기능하였다.







    [영화의 역사 이야기 시리즈]


    [1] 영화의 탄생

    [2] 볼거리로서의 영화

    [3] 1차 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영화

    [4] 2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5] 30~4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6] 2차 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영화

    [7] 독일 표현주의 영화, 소비에트 영화

    [8] 프랑스의 아방가르드와 시적 리얼리즘

    [9] 네오 리얼리즘과 뉴 이탈리안 시네마

    [10] 50년대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







    1920년대에는 기존의 독립 영화사들이 주류 영화사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와 경쟁했던 영화 특허권 회사는 살아남지 못했다. 유니버설,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유나이티드아티스츠 등의 영화사들이 경쟁하면서, 상대방을 손 떼게 만드는 자본의 증식이 필요해졌다. 이로 인해 영화사들의 경제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로고만 보아도 가슴이 떨리는 유니버설은 영화 초기의 경제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제작분야에서 경쟁이 일어났는데, 이후에는 전국적 배급의 확보가 중요시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 중반에는 세 거대회사가 싸움을 벌였고 이러한 폐쇄적인 체제에서 독립 제작자들은 제외되었다. 영화 상영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20년대 이후 극장들이 대대적으로 생기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발표작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무절제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돈을 벌기 위해 돈을 투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결국 영화도 예술이기 이전에 산업이었으며,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가인 미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당연스러운 것이었다.








    20년대 이후는 영화에 대한 재정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작 지휘자가 영화제작 전반을 지휘하게 되었다. 제작 지휘자는 어떤 아이디어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고, 배역을 정하고, 감독을 정하는 등 모든 것을 감독하였다. 그럼에도 어떤 감독들은 이에 저항하며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리피스, 세실 B. 데밀,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그리고 에른스트 루비치 등이 있었다. 데밀과 루비치 등은 주로 상업적이고 다소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영화들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지만, 흥행에는 대단히 성공하였고 일부 작품은 훗날 작품성을 재평가 받는다. 이들은 당시의 문화와 영화제작을 선도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초기의 가장 '할리우드' 스러운 영화였던 <국가의 탄생>


    영화사들의 기술자원이나 사업에 대한 혜안, 스타와 감독의 노련함 이상으로 미국영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대중 장르 영화이다. 장르영화들은 그것을 만들어낸 사회와 복잡한 관계를 가지면서 그 시대의 꿈, 열망, 모순을 드러낸다. 서부영화는 미국의 국가신화를 구현하였고, 코미디 장르는 1920년대에 가장 위대한 시기를 맞았으며 1940년대와 그 이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갱 영화, 뮤지컬 영화는 코미디와 더불어 그 시기의 영화산업을 주도했으며, 사회적 도덕적 관심사를 다루는 문제영화 또한 흥행하였다. 20년대의 문제영화는 주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과 경영자와 노동자의 대립, 달라진 결혼관이나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전쟁드라마 또한 성행하였는데, 세계대전 직후에는 ‘전쟁은 지옥’ 이라는 생각을 다루기도 하며 이전과는 다른 유형의 전쟁드라마가 만들어진 시기였다. 하나의 장르는 아니지만 액션과 어드벤처, 스펙터클의 대작들 또한 인기를 끌었다. 마지막으로 인종영화도 주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장르인데, <국가의 탄생>이 이를 대표하는 영화이다.


    역사상 최고(古)의 유성영화 재즈싱어


    20년대에는 유성영화가 도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일본의 변사나 브라질의 피타스 칸타타스 등의 방식으로 음향효과들을 만들어냈다. 초기의 영화들은 음악연주와 함께 상영되었지만 이는 영화자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워너브라더스는 1926년에 최초로 장편 무성영화를 발표했고, 영화계는 녹음된 음향의 밝은 미래를 예언했다. 다른 영화사들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망설였는데, 대개 산업 자본적인 이유였다. 일부 비평가들은 유성영화를 일시적인 유행으로 간주하여 곧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유는 무성영화의 역동성이 유성영화에서는 대사를 읊조리는 동적인 매체로 변질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20년대 말에 이르자, 동시음향 영화가 미래의 보편적인 형식이 되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실제로 1930년대에는 세 가지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어 유성영화는 한층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변모하였다. 1928년에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여 최초의 야외 음향촬영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유성영화는 미국에서 처음 등장하였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가장 먼저 유성영화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였고, 1930년대에 이르러 서는 유성영화의 성숙에 단계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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