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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이야기 : 2차 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영화
    Movie/영화 이야기 2018. 8. 19. 23:48



    영화의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다 보니, 미국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미국영화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후에 다루게 될 아방가르드, 독일 표현주의, 이탈리안 시네마 등 다른 국가에서의 중요한 흐름들도 있지만 문화산업으로써의 영화의 큰 맥락을 이해하려면 미국을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드디어, 현대 영화로 들어가기 이전에 살펴보는 마지막 미국 영화 이야기이다.







    [영화의 역사 이야기 시리즈]


    [1] 영화의 탄생

    [2] 볼거리로서의 영화

    [3] 1차 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영화

    [4] 2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5] 30~4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6] 2차 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영화

    [7] 독일 표현주의 영화, 소비에트 영화

    [8] 프랑스의 아방가르드와 시적 리얼리즘

    [9] 네오 리얼리즘과 뉴 이탈리안 시네마

    [10] 50년대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







    전쟁이 일어나면서, 영화 산업은 유독 미국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다. 영화를 제작할 여력이 있는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전쟁의 피해 때문에 예술의 발전이 더뎌지지 않은 곳이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도 영화와 관련된 예술활동이 있기는 했지만, 선전 영화나 네오 리얼리즘 영화와 같은 제한된 국면에서의 발전이었다 (사실 선전 영화는 발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영화산업에는 다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전후 영화관람객의 감소와 연방대법원의 독점 판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독립 제작된 영화들이 서서히 활개를 치는 시점이었으며(30~40년대에 이미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탈 클리셰'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영화라는 산업 자체가 국제화 된 시점이기도 했었다.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산업은 큰 위기를 맞이했었다. 마치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종이책 시장이 위협을 받았던 것 처럼.



    '시대' 그 자체가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었다. 이 시기에 변화를 이끈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텔레비전을 들 수 있다. 텔레비전은 전후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영사기를 통해서 보는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영화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이 생겨나던 초기의 영화사들은 텔레비전과 경쟁을 벌이다가, 이후엔 텔레비전 제작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상의 호흡이 짧고, 광고 등의 자본주의적 개입이 심해지면서 텔레비전은 이후 점점 B급 영화와 비슷한 영상물이 되어갔다. 제작사들은 영화가 텔레비전 영상물과의 차이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화의 퀄리티와 극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텔레비전이 뉴스나 B급 영상물을 방영하는 매체로 자리를 잡게 된 이후에는 다시 영화사 쪽으로 제작자들이 이동하였다.


    그러나 흥행수입의 감소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영화산업은 살아남기 위해 자체적인 산업을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새로운 화면 방식을 도입한 것이었다. 텔레비전 영상과의 차이점을 생각해내다 개발한 것은 3D 영화였는데, 3D 영화는 52년에 처음 도입하였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반면 3D 영화와 동시에 개발되었던 와이드스크린은 영화에 장대함을 부여하며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이 기술의 정착으로 영화매체는 미학의 변화와 더불어 수익성장까지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와이드스크린이 앞으로의 영상물을 독점할 것이라는 우려와는 다르게, 와이드 스크린의 사용법은 전쟁이나 역사, 스펙터클을 표현한 화려한 영화에서만 남게 되었다. 가벼운 코미디나 B급 드라마를 감상하고 싶은 관람객들에게 와이드 스크린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와이드 스크린 기술로, 영화는 다시 한 번 도약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의 위상은 예전과는 달랐고, 영화 자체의 경쟁력이 감소한 뒤부터는 주요 영화 제작사들이 더 이상 이전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독립제작 영화사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감독들은 새로운 위상을 얻었고, 어빙 탤버그 같이 제작에 대한 지나친 권력과 통제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영화 자체에 가해진 규제 또한 완화되었다. 그 중간에는 MPAA의 규약을 단계적으로 해제하기도 하였고, 지역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또는 영화 내용에 대한 규제보다는 연령에 따라 관람을 통제하기 시작하기도 한 시점이었다. 어쨌든 결국,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과 동맹을 맺은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해 위협을 느낀 미국 영화산업에서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활동하였다. 이 위원회는 영화계에서 공산당을 색출해내는 것이 주요한 활동 임무였다. ‘할리우드의 10인’ 사건을 비롯해 영화산업에서 좌익세력의 축출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는 블랙리스트의 시대로 나아갔다. 이러한 것들은 영화산업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 시기의 경직된 미국의 사회분위기는 영화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 장면.



    2차 대전 이후 할리우드의 주요 장르는 와이드 스크린을 활용한 영화장르들이었다. 가장 미국적인 장르이면서 동시에 인디언 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기도 한 서부극 장르, 삶에 대한 낭만적인 시각을 보여 준 화려한 뮤지컬 장르가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소년 영화가 부상하였는데, 할리우드는 이 시기에 10대 관객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가정에서의 텔레비전 권력을 상실한 10대는 돈이 되는 새로운 관객층이었으며, 저렴한 비용에 몇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영화라는 예술은 청소년들에게는 매력적인 매체였다.



    이 시기에 배출된 할리우드의 보물(당시에는 지금처럼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앞서 말한 대로 전후 시기에는 걸출한 영화 감독들이 다수 배출되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감독으로 빈센트 미넬리, 조지 쿠커, 빌리 와일더, 더글라스 서크, 앨프레드 히치콕을 들 수 있다. 이들이 만든 이 시기의 작품들은 할리우드와 관객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영화들이다. 이 감독들은 지금까지 언급한 1950년대의 과도기 미국영화의 변화와 그 전통 위에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감독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히치콕의 영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재 포스팅을 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현대 영화사에서 한 명을 뽑으라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중 하나가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역사 시리즈를 모두 완성하면, 고전사부터 현대사까지의 명 감독들을 리뷰할 생각인데, 기회가 된다면 히치콕에 대해서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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