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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이야기 : 30~4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Movie/영화 이야기 2018. 8. 14. 23:45



    유성영화, 장르영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할리우드에서는 어느덧 영화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가 되었다. 대공황을 거쳐 30년대를 지나면서 영화라는 매체는 현재의 드라마처럼 하루하루 소비되어지는 가벼운 대중예술로써 기능하였다. TV와의 구분이 없던 시절이기에, 연속극의 형태와 같은 영화들이 유행하였고 영화관이 동전에서 유래한 '니켈로디언' 이라는 용어로 불릴만큼 저렴한 가격에 문화생활 영위가 가능했다. 이전의 역사에서는 영화 자체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가 중요했었다면, 30년대 할리우드 영화사는 인류의 대중문화로써 영화가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지점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여길 만한 부분이다.







    [영화의 역사 이야기 시리즈]


    [1] 영화의 탄생

    [2] 볼거리로서의 영화

    [3] 1차 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영화

    [4] 2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5] 30~4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

    [6] 2차 대전 전후의 할리우드 영화

    [7] 독일 표현주의 영화, 소비에트 영화

    [8] 프랑스의 아방가르드와 시적 리얼리즘

    [9] 네오 리얼리즘과 뉴 이탈리안 시네마

    [10] 50년대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







    미국의 경제 대공황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더욱 발전하였다.



    미국의 1930년대는 대공황을 비롯한 좌절을 겪은 시기였다. 동시에 이 시기는 미 연방정부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영화는 중요한 대중문화 형식이었다. 30년대의 미국의 오락영화는 오늘날의 텔레비전 시리즈물과 좀 더 비슷했으며 관객의 기대도 이와 비슷했다. 영화의 관례적 내러티브 기법은 고정되어 있었으며, 거대 영화사들이 자신의 고용자들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때문에 감독보다는 제작자나 회사의 스타일이 더 중요하였다. 어떤 감독이 영화를 촬영하는가보다는, 어떤 제작자가 어떤 스튜디오에서 만드느냐가 영화 내용과 분위기에 훨씬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뻔한 드라마물, 뻔한 탐정물 혹은 뻔한 서부극이 스튜디오별로 붕어빵을 빵틀에서 찍혀나오는 붕어빵마냥 양산되었다. 마치 현재의 아이돌 가수들이 멤버 자체의 구성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개성보다 YG, SM 과 같이 소속사 개성에 더욱 영향을 받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유성영화로 옮겨간 미국 영화계는 그 이후 약 20년간 수직적인 통합 영화산업 경제시스템을 구축한다. 거대 주요 영화사들 몇몇이 MPPDA라는 미국 영화협회를 통해서 영화산업을 지배하게 된다. 거대 영화사는 영화 필름을 극장주에게 배급하고, 극장주는 그 영화 필름을 이용하여 최대의 수익을 얻으려고 하였다. 영화 교환소, 일괄 계약, 선매 등의 특징적인 관례가 배급사와 제작사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직적 지배의 시기에 독립 영화사들은 거대 제작사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당하였다.



    united artists의 영화 밑에 찍혀있는 MPPDA 로고이다. 당시 미국영화는 이 협회에 의해 독점적으로 배급되었다.



    영화산업 전반의 수직적 지배는 대중에게 수용될 수 있을 만한 내용의 영화를 만들도록 영화산업 스스로 영화를 단속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자기 규제의 움직임은 1차대전 이후에 시작되었는데, 미국영화제작배급협회의 헤이스 체제 협회가 출범하면서 영화제작 규약을 내놓게 된다. 20~3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고정된 내러티브를 가진 클리셰의 향연이였던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규약 속에서 작업하는 영화감독들은 무언가 억압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영화 속에서 은근히 암시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영화광들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이 시기의 영화에서 메타포나 숨겨진 장치등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다.



    35년에 만들어진 미국영화감독협회의 노력으로, 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감독들이 영화제작 과정에 있어서 전보다 더 많은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 이전처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좋은 영화와 감독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최고의 시각적 스타일리스트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장르의 달인 하워드 호크스, 사회적 본질을 탐구한 코미디물의 프랑크 카프라, <역마차>를 위시한 서부영화에서 미국적 정신과 서구의 폭력을 지속적으로 탐색한 존 포드 등이 모두 이 시기의 거장들이다.









    영화의 장르는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는데,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변화를 맞이하였다. 관객들은 소리와 함께 등장한 세 가지 새로운 유형의 코미디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말의 재치를 활용한 코미디, 수다스러운 주인공을 활용한 코미디, 스크루볼이라 불리는 슬랩스틱의 변형 등의 유형이었다. 또한 소리의 등장으로 서부극 장르는 사랑 받는 장르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30년대에 가장 두드러진 장르들은 뮤지컬, 갱, 공포, 정통 코미디, 만화 장르였다. 특히나 월트 디즈니가 선구적으로 시작한 만화영화 장르는 소리와 색을 입히면서 활력을 더했다.



    이 시절 최고의 코미디 스타 찰리 채플린



    소리 자체에 의존하는 장르인 뮤지컬은 백스테이지 뮤지컬과 춤이 가미된 형식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갱 영화는 주로 경제공황과 전쟁에 의한 정신적 혼란, 도덕과 무관한 부의 축적과 같은 사회적 딜레마를 언급하며 번성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공포영화는 음향효과나 시퀀스를 이용한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현재의 공포영화와는 달리, 독일에서 유래한 조명적 변화에 근거한다. 이를 표현주의 기법이라고 하는데, 후의 영화 이야기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어찌되었든 이 시기의 공포영화 역시 굉장히 성행한 장르였다. 또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여성영화가 더욱 인기를 끌었는데, 주로 사랑이야기와 가족 멜로드라마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가 각각의 스타일대로, 각각의 사조대로 꾸준히 발전하였고 현재에도 토대가 되는 장르적 특징들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전쟁이 발발한 30년대에, 전쟁에 정신이 팔린 유럽과 다르게 미국은 계속해서 오락거리로서의 대량의 영화를 연합국과 중립국에 제공했다. 이것이 할리우드가 이 시기에 유독 영화산업이 발전했던 이유이고, 오히려 대내적인 영화예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현재와 같은 장르적 특징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시기에 나온 영화들은 20~30년대의 영화와 연장선에 있었는데, 예술적으로 확고해진 장르들은 서서히 리얼리즘으로 나아가는 전후의 경향을 예고하였다.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영화 <시민 케인>



    또한 애국주의와 건전성이 만연하던 1940년대에는 필름 누아르 라는 새로운 유형의 영화가 출현했다. 혼란과 타락, 음울함과 판타지를 제공하는 이 유형의 영화는 시각적인 효과에 충격을 의존하고 있었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그와는 반대되는 자극적인 문화적 경향을 띠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보다. 이러한 필름 누아르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 프리츠 랑과 존 휴스턴을 언급할 수 있다. 또한 1940년대의 미국영화에서 오슨 웰스라는 천재 감독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시민 케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영화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영화팬이라면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고전 할리우드의 최고 명작 중 하나이다.



    30~40년대의 미국영화는 영화산업이 지배하는 시스템 내에서, 이 시스템의 거대한 재원과 풍부한 지원으로 엄청난 창작의 무대가 되었다. 할리우드의 장인들은 검열에 직면하면서 관습들을 조롱하기도 하였고, 창의력이 풍부한 감독들은 독창적인 최고의 작품들을 쏟아낸 열정적인 시기였다. 영화사의 '고전'을 언급하며 감상에 젖는 영화광들은 보통 이 시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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